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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피부를 본뜨기 / 조선령(부산대학교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


● 수량화되고 기록되고 위치정보가 기입된 세계. 흔히 '아카이브적'인 것으로 명명되는 이 세계는 통상 다채롭고 무한한 자연의 세계를 기술적 방법을 통해 정돈시키고 개념화시킨 결과로 등장한다. 현대미술의 많은 작업들은 후자의 세계를 전자의 세계로 치환하고, 객관적 현실만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이나 기억 자체도 아카이브적으로 변형된 현실을 보여주려고 한다.

● 그러나 김미련의 작업은 현실을 기록으로 환원하기 위해서 기술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통상의 아카이브적 작업과 구별된다. 스캐닝, 스톱 애니메이션, 몰핑, 3D 프린팅 등 다양한 기술적 방법을 사용하여 기계적 기록의 행위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얼핏 현실의 아카이브화라는 주제가 김미련의 작업에서도 나타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사용하는 기술적 방법론은 현실을 수량화하거나 개념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공간 속에 흘러가버리는 경험의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마치 탁본 작업처럼 '촉각적 차원에서 떠오기 위한' 방법론으로 읽힌다. 사물과의 순수한 접촉에 의해 순간을 보존하려는 욕망, 그것은 변화하는 것과 대립되는 영구적인 것을 옹호하는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소멸하고 있는 것들과 아직 오지 않은 것들 사이의 틈새를 보여주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Spatial Plants」 시리즈는 작가가 여러 장소에서 채집한 다양한 식물들을 스캔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평면 위에 '눌러놓은' 것이다. 유리판 사이에 끼여 납작해진 것처럼 식물들은 2차원적으로 변형된다. 3차원의 공간성이 삭제되는 대신, 식물들 하나 하나의 물성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식물은 선명한 원색과 디테일한 질감을 가진 사물로, 또 어떤 식물은 뒤에 숨은 어두운 그림자처럼 표현된다. 작가는 이 시리즈를 여러 형식으로 변주한다. 줄기나 잎들을 마치 동양화의 붓질이 지나간 듯 모호한 흔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식물들이 발견된 위치에 대한 정보, 즉 정확한 위도와 경도의 숫자들을 함께 표시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식물을 두 사람이 다른 곳에서 스캐닝하여 파일로 주고받고, 하나의 평면 위에 중첩시켜 레이어를 만들기도 한다. 프로젝션 영상으로, 허공을 떠도는 무게 없는 부유물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 스캐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작가는 하나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경험과 기억의 순간 그 자체를 얇은 막처럼 떠온다. 이 작업에 별명을 붙인다면 아마도 '기억의 피부를 본뜨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본뜨기 작업은 원본과 사본이라는 두 항들 사이의 일치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다양하고 불규칙한 형상들이 스캔이라는 기계적 과정을 거쳐 기록될 때, 감성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 사이에는 미묘한 충돌이 생긴다. 이러한 충돌은 경험과 기록 사이의 완벽한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균열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기록'의 장소는 이 '어디에도 없는' 공간 안이다. 이 공간은 단지 개인의 장소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다른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Spatial Plants」 시리즈의 주제의식은 작가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부터 이미 맹아를 갖추고 있었다. 2008년 작 「Before & After」에서 작가는 잡동사니 사물들로 가득 찼다가 다시 비워지는 벽장의 시간적 변화를 스톱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 바 있다. 전시가 열릴 때 페인트로 발라져서 벽의 일부가 되었다가 전시가 끝난 후 다시 벽장이 되는 과정을 담은 영상은 수많은 공간적 레이어들의 중첩으로 표현된다. 같은 프레임 속에서 여러 번 겹쳐지는 이 레이어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의 피부를 본뜨는' 작업이다.

사진이나 영상은 인간의 주관이라는 필터 없이 자연의 사물들을 직접 기록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된 매체이다. (스캐노그래피는 카메라 없는 사진이라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는 사진의 원초적 욕망에 더 가까이 가 있다) 김미련의 작업이 갖는 독특한 점은, 사진이나 영상을 자연의 기계적 기록이 아니라 거꾸로 기계가 만드는 예술적 기록의 매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소멸과 보존, 과거와 미래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서 중첩되는 레이어들은, 마치 물수제비를 뜨듯이, 시간과 공간의 피부 위를 스쳐 지나간다.

● 이 시간과 공간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기억과 경험이 스며있는 특별한 영역이다. 서울의 문래동, 독일 뒤셀도르프의 교차로, 창녕의 우포늪 등 작가는 특정한 장소에 대한 경험에 예민한 촉수를 돌려왔다. 예를 들어 문래동에서 만들었던 2014년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문래동의 역사를 겪어온 주민들의 전신상을 3D 프린트로 제작하기도 하고, 한 대안공간에서 키우는 고양이들의 목에 카메라를 달아서 고양이의 눈으로 본 골목들의 모습을 담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들 역시 기술 혹은 매체의 기계적 특성을 이용해서 경험의 층들을 얇게 떠내면서 공동의 기억으로 구성된 '어디에도 없는 시공간'을 전사하려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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