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아티클 | ‘플래시몹적인’ 모임의 공간-‘옥상의 정치’에 대한 단상 / 조선령(미술비평/부산대)
최근 주제가 작품들을 선 규정하는 제한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제 없는 프로젝트를 꾸리려는 움직임이 종종 목격된다.
이런 움직임은 협업의 과정 자체에 중점을 두거나 작가들의 자발적인 작업에 큐레이터는 최소한의 개입만 하겠다는 취지의 프로젝트들로 나타난다.하지만 전시 혹은 (어떤 형식이건)하나의 예술적 프로젝트가 개념과 감각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전달하려는 시도인 한 주제 없는 프로젝트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차이는 그 주제가 어떤 층위에서 작동하는가 하는 것 뿐 이다.
협업이나 과정이라는 개념 역시 하나의 주제인 것이고 그것을 큐레이팅하는 시각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이다.(단지 큐레이터의 개입이 최소화된다는 것을 좋은 전시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동문 전을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좋은 주제인가 아닌가 하는 것 뿐 이다.
어떤 주제는 내용적인 층위에서 작동하고 어떤 주제는 형식의 층위에서 작동한다.
어떤 주제는 개별 작품의 가능성을 제한적으로 규정하며 어떤 주제는 그 가능성을 확장적으로 열어준다.
문제는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면서 동시에 개별 작품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열어주는 주제를 잡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전국 5개 도시 (광주, 대구, 대전, 부산, 서울)대안공간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 <옥상의 정치>가 갖는 장점은 여기에 있다.‘옥상’이라는 모티브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기호를 그 속에서 다양하게 추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시위로 대표되는 정치적 행위의 공간, 옥탑 방으로 상정되는 남루한 생존의 공간, “용산참사”와 같은 사태가 말해주는 주거권의 문제, 화재와 같은 비상사태에 사용되거나 자살과 같은 극단적 사례에서 등장하는 ‘예외적인’ 공간의 성격 등등) 선규정적이고 한정적인 주제로 머물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물론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실제 참여 작품에 의해 현실화되어야 한다.이 점에서 <옥상의 정치>는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었다.
다시 말해, 이 주제의 가능성들을 감각적으로 충분히 발현시키면서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이 개념을 보충하거나 재가공하는 작품들이 기대만큼 풍부하지는 않다.
그런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옥상의 정치>는 주목할 만한 특징을 가진 프로젝트이다.앞에서 거론한 주제 선정의 생산성만이 아니라 다섯 개 도시의 공간들이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같은 날짜에 프로젝트를 오픈한다는(2014년의 현실에서 보면 다소 믿기지 않는) 계획을 실현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심지어 생생한 필자들의 각 원고지 100매 가까운 분량의 글 일곱 편을 모아서 책까지 발간했다).
계획의 실행과정 그 자체가 주제와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산발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계획적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순발력 있게 특정목적을 위해 모였다는 방식이 그렇다.
이 작업방식은 거의 한 판의 플래시 몹을 연상시킨다.배후에서 기획의 밑그림을 그리고 협력의 초석을 놓았던 사람들은 많지만 상식적인 조직이나 협력체는 없었다.(사실 상시적 협의체들의 활동은 종종 과정에서 노출되는 관료상 이외메모 에 함께 모여서 뭔가를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서울 참가공간인 대안예술공간 이포의 경우(필자는 여건상 다섯 개 도시 중 부산과 서울에서 개최된 프로젝트만을 직접 보았으며, 다른 지역 전시는 사진과 자료만을 접했기 때문에 전체를 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아래에 이어지는 글도 부산과 서울만을 사례로 들고자 하며, 이 점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문래동 일대에 거주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가에게 이 프로젝트에 대한 제안서가 뿌려졌고, 그에 호응하는 30여명의 작가들이 3주라는 짧은 준비기간에 각자의 프로젝트를 고안하고 품앗이 형식으로 상호협력하면서 오프닝 날짜를 맞추었다(이포는 다섯 개 도시의 공간 중 상대적으로 늦게 합류했다). 흔히 짧은 준비기간, 부족한 장비, 도와줄 스텝의 부재 같은 단어들은 프로젝트의 부실성을 말해주는 징표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와 같은 작업방식의 기동성과 상호 협력성, 순발력은 앞에서 말했듯이, 플래시 몹적이며 도시 유목민으로서의 작가들 자신의 생존방식과도 연결된다.
오프닝 퍼포먼스를 비롯한 다수의 퍼포먼스/영상작업이 주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대안예술공간 이포’의 성격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도시유목민/플래시 몹적인 작업방식과 공명하는 것이기도 하다(공간의 점유를 통해 작가자신의 현존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장르가 퍼포먼스이며, 이를 순발력 있게 촬영하고 편집하여 상영까지 할 수 있는 매체가 영상이라는 점에서),
예를 들어 강수경은 <나는 알고 있다>에서 옥상에 붉은색으로 커다랗게 ‘나는 알고 있다’라는 글자를 쓴다. 이 붉은 글자는 마치 철거지역에 용역들이 마구잡이로 쓴 글자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하루가 다르게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고 철공소지역의 면적이 줄어들고 있는 문래동의 현실과 공명하는 한편,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작용 역시 풍부하게 생산한다.
여기에 “나는 문래동 월세가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로 시작되는 텍스트가 추가됨으로서 이러한 의미작용들은 다시 한 번 예술가/도시 유목자들/내쫓긴 자들의 존재방식 문제와 맞닿는다.
김홍빈의 작품 <꿩 잡는 게 매> 는 문래동의 모 빌딩옥상에 야간에 ‘무단으로’ 올라가서 자동차 배터리를 이용해 형광등을 들고 골프 치는 흉내를 내는 작품이다.
아래에 펼쳐진 지붕들을 보면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이 행위는 한계의 공간을 유희의 공간으로 바꿈으로서 봉합된 현실에 어떤 ‘틈’을 만들어낸다.
<옥상의 정치>아이디어의 발원지인 부산전시는 이번 프로젝트를 계기로 새로 출발하는 ‘공간 힘’에서 개최되었다.이 경우도 프로젝트 진행과정이 주제의 내용성과 공명하는 일이 생겼다.
‘공간 힘’은 ‘대안공간 반디’가 문 닫은 후 현저하게 축소된 대안공간 문화를 이을 것으로 기대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참여 작가중 한 명이 작업실을 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장소이기도 하다.
(실제로 전시공간은 작가의 작업실 한 쪽 공간이기도 하다).이러한 사실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이 프로젝트가 던지는 확장된 질문의 한 갈래로 느껴진다.
‘공간 힘’의 전시에는 회화가 다수 출품되었으며, 저항의 공간이자 한계의 공간으로서의 옥상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더 부각된다. 그러나 이 전시 또한 다양한 상상력의 장이기도 하다.
가동을 멈춘 공장의 기묘한 기계 구조물 위를 상처 입은 임산부가 기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방정아의 <올라오는것>이나, 아무런 해석 없이 옥상의 네모난 공간만을 그린 김해진의 작품<옥상>등이 그 사례이다. 또한 서울의 경우와 비슷하게 부산 프로젝트에서도 일부러 특정한 지역성을 드러내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현실의 공간과 중첩되는 작품이 발견된다.
부산 특유의 주거형태인 ‘옥상마을’의 골목에서 잠시 빌려온 의자들로 구성된 김경화의 옥상의 설치작품 <꿈꾸는 의자>나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는 해운대 초고층아파트 옥상에 진입하려고 시도하는 내용을 담은 은주의 <옥쌍탈출>이 그 사례이다.
옥상은 공적인 공간이면서 그 공공성이 보편적인 방식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특이한 공간이다. 그것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점에서 한계의 공간이며 평소에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잉여의 공간이다. 또한 그것은 더 이상 내몰릴 곳이 없는 사람들의 생존공간이기도 하지만 더 맑은 공기와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
가시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 속에서 생존과 자유의 대립이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는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 <옥상의 정치>가 던지는 질문들은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