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공간을 본 뜬 기억의 피부 / 최엄윤 (문화기획자, 글짓는 이)
피부는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상피조직으로 표피, 진피, 그리고 피하지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피부를 가졌을 법한 생명체들을 떠올리면 시간이 지날수록 주름지고 색 바래고, 상처와 얼룩 등 흔적이 남은 표면을 상상할 수 있지만 ‘시간의 피부’는 어떤 모습일까? 지난 5월 갤러리 아트컨티뉴에서 진행된 김미련 『시간의 피부』 전시의 축적된 작업들을 나이테를 그리듯 따라가며 그 의미를 유추해 본다.
『시간의 피부』 는 「피부의 정치」, 「공간 속의 식물」, 「풍경의 좌표」 세 가지 공간 구성으로 이루어진 전시로 「공간 속의 식물」, 「풍경의 좌표」에서는 작가가 2009년부터 13년 동안 발전시켜온 스캐노그래피 작업 130여점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형한 스캐너 위에 일상의 사물과 채집한 식물을 올려놓고 사진 전사기법을 통해 3차원의 공간 속에 있는 대상을 2차원의 평면으로 본 뜬 작품들로 입체를 잃은 대상들은 오히려 어두운 우주 속을 유영하는 생명체처럼 표면 위로 선명히 드러났다.
기계 장치인 스캐너를 통해 빛과 전기에너지의 기술로 대상과 만나는 작업은 정밀하고 철저하고 차갑게 여겨지지만 빛, 스캐너와 사물의 위치, 실수 등 여러 우연적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디지털 기계와 아날로그적 상황이 빚어내는 미묘한 균열의 결과로 작가는 묘사하는 세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세계 속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감정을 포착하고 확장된 사실성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의 스캐노그래피 첫 작업인 <가창의 봄>은 그녀가 2009년 대구 달성군 ‘가창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기간 동안 폐교에서 발견하고 채집한 대상들을 스캐닝을 통해 일기 쓰듯 기록한 작품이다. 도심을 벗어난 한적한 시골 마을, 아이들이 떠난 초등학교, 그 환경을 둘러싼 자연 속에서 돋아나는 식물과 누군가 쓰다버린 농기구, 이불가지, 화분 등 일상에서 발견한 크고 작은 사물들, 가끔 찾아오는 이웃과 놀러 오는 아이들과의 만남, 그 흔적들. 작가는 채집, 관찰, 탐구의 과정을 수행하여 스캔으로 본 뜬 이미지의 먼지를 털어내고 세심한 보정을 거치며 봄의 향연을 오롯이 만끽했다고 한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시도해보는 스캐노그래피 작업에 대한 심취와 흥분, 폭발하는 봄의 감각과 감성을 기쁨과 환희로 기록한 <가창의 봄> 95점 연작 앞에서 관객은 고요함과 겸허함을 경험한다. 그것은 마치 탐사선을 타고 먼 시-공간의 우주로 날아가 버린 탐사 대원처럼 외딴 공간, 고립된 시간 속에서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부유하는 피사체 하나하나를 매일매일 마주하고 기록한 작가의 골몰하는 몸짓이 겹쳐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이듬해 민중 미술의 현장에 투입되었던 김미련 작가는 99년부터 10년의 독일 유학 동안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지 않은 상태에서 주체가 중심이 되는 서구 문화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독일에서의 시간은 ‘나’라는 주어가 상실되었던 시간을 떠나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한 시간이었다. 외롭고 불안한 그 시기 동안 그녀에게 따뜻한 위안을 주었던 것은 바로 어린 시절 고향에서 늘 보던 익숙한 들풀들이었다. 이후 7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정착한 한인들을 만나며 그들이 가꾼 베란다의 식물, 텃밭, 주말농장의 모습 속에서도 “체화된 시지각적 정서의 동경과 귀소본능(歸巢本能)”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창의 봄>은 하나의 경계점이 되었고, 2010년 작업 <The spatial plants>시리즈와 <Time flower>에서는 마치 먼 우주를 돌아 고향으로 되돌아 온 것처럼 그녀는 민중에서 개인으로, 그리고 개인에서 관계 속의 자아로 새로운 소통과 연대를 모색해 나간다.
사진 2. <The spatial plants 10>, 150x105cm_스캐노그래피_2010
사진 3. <Time flower I>, 60cm x 30cm_파인아트지에 피그멘트 인화_2010
<The spatial plants> 시리즈와 <Time flower>은 독일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 보내 온 식물의 이미지에 작가가 같은 시기, 대구·경북 지역을 이동하며 발견한 동일종의 식물을 스캔한 이미지를 겹쳐 완성한 작품들이다. 여기저기 피어나는 들풀처럼 ‘어디에나 있는’ 존재의 단면을 소재 삼아 이미지와 이미지가 겹쳐지는 텅 빈 가상의 공간, ‘어디에도 없는’ 세계 속에 기억, 관계, 시간, 즉 삶의 조각들을 본 떠 박제한 작품들이다.
서울 문래동(2014), 경북 포항(2015), 경남 창녕의 우포늪(2016), DMZ(2021) 등 작가는 특정한 장소의 사람, 사물, 식물과 같은 여러 대상을 만나고 탐구하고, 모으고 해체하며 스캐노그래피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 한편 2012년 <로컬포스트 콜렉티브>를 결성, 전 방위 예술행동의 동력을 형성했다. <로컬포스트 콜렉티브>는 대구를 기반으로 한 다원예술, 소셜미디어아트 등 예술 그룹으로 장르, 지역, 국경을 넘나드는 동시대 예술작업은 물론 공동체 및 사회 문제에 적극적인 예술 행동을 도모하는 활동단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김미련 작가를 비롯해 사진, 영상, 음악, 무용, 연극 외 여러 장르의 예술가와 인권 활동가, 환경 운동가 등 다양한 참여자들이 청도 각북면 삼평리 345kV 송전탑 반대 투쟁, 성주 소성리 사드배치 반대 투쟁, 재개발로 사라지는 동인 아파트 등 이슈 현장에서 각각의 개성과 재능으로 거주민들과 함께 현장을 기록하고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문화예술로 연대해 왔다.
『시간의 피부』의 한 섹션을 이루는 <피부의 정치>는 마치 두꺼운 나무토막을 이용한 조각품처럼 보이지만 대통령선거나 지방선거 기간, 또는 미술관이나 미술프로젝트의 현장에서 버려지는 인쇄물을 쌓아올리고 붙여서 갈아낸 결과물이다. 작가는 연대의 장소, 사건의 한가운데서 삶의 구체성을 띈 기억과 경험을 통해 “정치와 예술의 현장에서 소외되는 주권자들과 주체들의 쌓여가는 비애”를 시간, 역사, 기억의 흔적들이 쌓여 희미하게 낡아가고, 무뎌진 오브제로 표현하였다.
사진 4. <검열의 피부>, 6.7x6.7x3.5cm_혼합재료_2018
사진 5. <피부의 정치 I, Ⅱ, Ⅲ>, 혼합재료_74×52×3cm×3_2022
작가는 스캐너, 3D 프린터, 카메라 등 다양한 기계를 활용한 기술과 회화, 사진, 조각, 영상, 스톱 애니메이션, 몰핑 등의 방법으로 관객이 시공간 속에서 소멸하는 순간을 촉각적으로 인지하도록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평면 앞에서도 피부로 느끼도록 한다. 끊임없이 관찰하고 실험하는 탐구자로서, “개인과 국가의 역사와 운명이 교차하는 상태좌표의 기록이 나의 '가장 보통(保統)의 일'”이라고 말하는 김미련 작가의 ‘시간의 피부’는 “충만한 인간의 삶 속에서, 그 ‘세계-내-존재’ 속에서” 시간-공간을 본 떠 닿고 싶은, 관계 맺고 싶은 기억의 피부일 것이다.
사진제공 @김미련 작가
참고 : 김미련 작가 아카이브 https://www.kimiry.net/, 로컬포스트 아카이브 https://www.localpost053.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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